여행을 가다. 후쿠오카, 첫번째

201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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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18.09.03(월) ~ '18.09.05(수)


이렇게 한심한 여행의 시작이라니.


달력의 앞자리 숫자만 바뀌었을 뿐,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어느 나른한 일요일 오후. 친구들과 점심을 먹던 중 갑작스레 후쿠오카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10만 원밖에 하지 않는 비행기표가 화근이었다. 저렴한 비행기삯이 화근일 이유는 전혀 없지만 어쩌다 보니 불행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예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는 'PARK HYEOK'이라는 사람의 항공권이 메일함에 날아들었다. 나는 이내 몇 가지 불행한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그 분이 찾아오게끔 결제는 내가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쓴 돈은 맞지만 그 항공권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불행이 더 있었다. 그 비행기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발권을 한 익스피디아 고객센터에서도, 비행기 주인인 에어서울 체크인 카운터에서도 이름을 바꿔줄 수 있다는 답변은 해주지 않았다.


돈을 내고서라도 이름을 바꾸려 했지만 그것도 안 된다고 하니 도리가 없다. 내 10만 원은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내 실수라서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나와 마주한 직원 분들은 사내 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일 뿐이니 그분들에게 따질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에어서울과 익스피디아를 다시는 이용하지 않겠다는 아무 의미 없는 다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보태고는 카운터 옆 의자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보딩 브릿지 문턱조차 넘지 못했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 같은 피로감이 엄습한다. 마음으로는 이미 18도에 맞춰진 에어컨 바람 아래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는 중이지만 숙소까지 결제를 마친 덕분에 계좌에서 빠져나간 15만 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결국 15만 원을 주고 새로운 항공권을 사고 말았다. 단돈 10만 원짜리 비행기표가 25만원으로 둔갑하는 마술을 경험하고 나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아니, 돈은 이미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빼먹은 것은 없나 하나씩 손에 꼽아 본다. 여권, 핸드폰, 지갑, 배터리, 노트북, 항공권은 수속하면서 받으면 되고.. 엔화, 엔화, 엔화...


미친 새끼. 환전을 안 했다. 공항에 와서 환전 해야지 생각해 놓고는 아침이 그 난리통이었던 바람에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부랴부랴 지하에 있는 하나은행에서 환전을 하려고 하니 미리 신청을 하지 않으면 현금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한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주거래 은행 ATM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도 촉박할 뿐더러 지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잠시 고민 끝에 바로 옆 ATM에서 돈을 뽑기 위해서 줄을 서는데 벽안의 외국인이 말을 건넨다.


'돈이 안뽑아져요. 근데 한국말을 못 읽겠어요.'


발이 동동 굴러질 만큼 마음이 급했지만 이역만리 타지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사정을 들어 보니 지하철을 탈 돈이 필요한데 카드의 마그네틱이 손상된 듯하다. 고민 끝에 만 원을 더 뽑기로 했다.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 탓에 대충 접은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고는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굳이 계좌번호를 받아야겠단다. 점점 더 격렬하게 떨리는 내 눈빛에는 아랑곳 않고 계좌번호를 적어간 그 여행객. 다행히 무사히 여행을 마쳤는지 '친절 감사합니다'라는 메세지와 함께 4천 원의 이자가 가산된 돈이 어제 입금이 되었다.



보딩 브릿지까지 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공항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전날 비행기표를 끊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를 후쿠오카로 실어다 줄 비행기를 보고 있으니 그저 눈물만이 앞을 가린다.



오사카도, 도쿄도 참 가깝다고 생각을 했지만 후쿠오카로 오는 길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비행기의 궤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박격포탄에 가까울 정도로 순항고도를 유지할 새도 없이 착륙등이 켜진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후쿠오카 하늘 위를 낮게 나는 비행기는 이내 활주로를 미끄러져 간다.



국내에서조차 모든 국적 항공사가 모이는 공항이 없는데, 후쿠오카 공항은 간사이, 나리타 공항과 함께 대한민국의 모든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쿄만 해도 600마일 가까운 거리이지만 후쿠오카는 한국에서 가장 거리가 먼 서울에서조차 그의 반도 되지 않는 280마일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착륙 후 게이트로 택싱을 하는 바깥에 펼쳐진 풍경은 어느 나라 공항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분명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해도 태양은 중천을 가르던 중이었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린 수속을 마치고 나니 지평선 어드메에 어중간히 걸쳐 있다. 후쿠오카 땅은 밟지도 못했는데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후쿠오카 지방의 유명한 마츠리의 필수 요소인 '야마카사'는 굳건한 자세를 미동 없이 유지하고 있다. (사실 뭐하는 데 쓰는 녀석인지 정확히 모른다. 이 지역에서 유명한 축제 중 하나인 '야마카사'에 쓰이는 축제용 가마를 '야마카사'라고 부른다는데, 축제 기간이 되면 사람들이 이걸 지고 거리를 활보한다고 하니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도록 하자.)



도무지 순탄한 것이 없는 이번 여행. 공항을 빠져나오니 아무것도 없다. 뭐가 문제일까 싶어서 안내소를 들렀더니 지하철은 국내선에서 타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국내선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다고는 하는데 한숨이 자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국내선으로 향하는 버스 안, 태양의 둥그런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지칠대로 지친 마음이지만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었던 것은 후쿠오카의 지하철 노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숙소가 위치한 나카스카와바타까지는 단 네 정거장,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약해진 심신에 커다란 무리가 갈 뻔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이렇게나 거대한 입간판이 나를 살벌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 한동안 잊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숙소로 가는 길. 소리없이 내린 어둠과 함께 내려 앉은 적막이 도시를 감쌌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다음날 태풍의 가장자리에 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사람 구경을 하기는 쉽지 않았고, 거리는 한적하기만 했다.



워낙 주리고 주렸던지라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배를 채우기 위해 길을 나섰다. 중심가인 텐진과 하카타가 불과 한 두 정거장이었던지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는 마음이 동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찾은 곳은 게스트하우스로부터 추천받은 '이노 이치방'. 숙소에서 도보로 불과 5분이 걸리지 않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동네 친구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 두 명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 옆에는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자그마하게 있고, 넓게 트인 주방 앞 의자에 걸터앉은 나의 머리 위로는 연고지 럭비팀으로 보이는 곳의 소품이 가득했다. 조용한 저녁이 흐르는 이곳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하이볼과 함께 시작한 저녁. 유자향이 슬며시 스치는 오징어가 함께 나왔는데, 묘하게 구미를 당기는 것이 순식간에 한 접시가 비었다.



첫 저녁은 교자와, 츠케멘 비슷한 무언가와 함께했다.



공복에 맛있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냐만 이 교자는 아주 바람직했다. 눈이 나도 모르게 휘둥그레지는 맛에 하이볼 한 잔이 추가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 첫날의 밤이 그냥 저물게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기로 한다.



자연의 빛이 사라진 거리에는 가로등과 간판, 가게 사이로 흘러나오는 형광등 불빛만이 남았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거리는 평화롭다.



지나가는 당신, 나를 마셔주지 않겠니. 나도 모르게 동전을 집어넣을 뻔했지만 수중에 이미 맥주 두 잔이 마셔 달라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다.




이틀동안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게스트하우스. 요란하지 않게 정갈한 분위기 덕분에 매일 밤이 편안할 수 있었다.



로비의 한 쪽 벽면은 가지런히 꽂힌 책으로 가득하다. 이곳의 주인장은 디자인을 전공한 것인지 관련된 책들이 무척 많았다. 그런 덕분에 한 번 읽어볼까 시도를 해보았지만 오직 일본어로 된 책밖에 없었으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무도 없이 적막만 남은 로비에서 두 캔의 하이볼과 함께한 첫날밤. 후쿠오카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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