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다. 싱가포르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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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18.01.17 ~ '18.01.19


작년 말, 나가노를 시작으로 해가 바뀌는 두어 달 남짓한 동안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유람했다.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기회를 보고자하는 의욕에 시작했다면 무언가 남았을까 가끔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차는데 그간 이룬 것은 생각보다 변변찮게 여겨졌고, 더 이상 가방을 만드는 사람으로 남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허기진 의욕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금 더 지체하면 밥값조차 변변히 못하는 사람이 될까 싶어 사업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고, 지난 두 달의 시간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외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나는 아직도 가방을 만들고 있다. 가방장이로 지낸 2년간의 외도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되리라 생각했던 싱가포르에서의 3일로 말미암아 말이다.


마땅히 남긴 것이 없어서 제대로 된 글 하나 남기는 것도 쉽지 않다. 3일 동안 갔다온 것은 맞는지, 저 날짜가 맞는지도 사실 모른다. 여권을 급하게 뒤져서 찾아낸 출입국 도장에 새겨진 숫자를 옮겨적은 것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남겨보려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리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아닌 것이 솔직한 마음이지만, 또 다른 해를 맞이하기 전에 남겨두지 않으면 이때의 감상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을 듯 하다. 그렇기에 꼭 남겨야겠다.



대낮에 인천을 날아오른 비행기는 한밤이 되어서야 싱가폴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멀기도 할 뿐더러, 그나마도 홍콩에서 환승까지 했던 덕분이다. 좁은 땅에 빈틈없이 들어찬 빌딩 숲을 생각했는데 멀리서 바라본 도심의 전경이 그렇지는 않다.



수속을 마치고 난 공항은 이미 한 밤을 지나고 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계절 구분이 없는 적도 부근에 위치한 싱가폴인 만큼 비행기 안에서 미리 여름 옷으로 갈아입었건만 조금씩 밀려드는 열기는 공항 문을 나서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이 참으로 남쪽이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싱가폴의 차량들도 운전석이 오른쪽에 위치한다. 비몽사몽간에 습관처럼 택시의 오른쪽 문을 열어젖혔는데 패달과 함께 핸들에서부터 이어지는 센터패시아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장을 차려입고 선 기사님의, 천장 너머로 마주한 약간의 당황한 눈빛은 덤.



고등학교 동기 하나가 싱가폴에서 개발자로 일을 하고 있다. 간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가웠는지, 친구의 선심 덕분에 이틀의 숙박비는 정산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상업지구가 밀집한 래플스 플레이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탄종 파가. 친구의 일터와 집이 있는 곳이다.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았던 이놈의 숙소는 실제로도 꽤나 많은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런 덕분에 달마다 빠져나가는 돈 역시 범상치 않다.



워낙에 갑작스럽게 찾은 싱가폴이었기 때문에 무슨 음식이 유명한지조차 전혀 몰랐고, 모든 끼니를 다 챙겨도 열번이 되지 않는 짧은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경험한 음식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친구 덕분에 내 지갑에서 돈 나갈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 첫번째 이유요(이게 가장 중요하다), 두번째는 '호커 센터'라는 곳의 존재 덕분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대형 마트에 자리잡은 푸드코트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분위기도, 이용하는 방법도 거의 동일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신용카드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에 더해 때에 따라 한국보다 저렴한 물가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 정도. 물가가 저렴한 동네는 결코 아니다만 적어도 호커 센터에서 통용되는 공식은 아닌 듯 하다.


친구가 그렇게나 먹어보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경험한 치킨 라이스, 이렇게 완벽하게 이름 지어진 음식이 또 있을까 싶다.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겠으나 아쉽게도 나는 공산품과 인공의 맛에 잔뜩 길들여진 사람이다.



그런고로 이 '락사'라는 국수는 나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훌륭한 선택지가 되었다. '네시아'로 끝나는 지역에서는 꽤나 흔한 음식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 경험하였다. 매운 맛이 살짝 도는 쌀국수인데, 한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입맛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보다 맛있는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재료들을 하나씩 나열해보면 이게 대체 무슨 맛일까 상상조차 쉽지 않지만 그런게 뭐가 중요한가, 맛있으면 그만이다.



한끼에 4천원을 넘기가 쉽지 않은 호커 센터가 지천에 있지만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쉬지않고 드나드는 식당들도 역시나 지천이다. 락사 다섯 그릇에 이 카레가 한 그릇인데, 아쉽게도 맛의 비례는 로그 스케일인 듯 하다. 친구가 사주는 것이었음에도 새삼스레 호커 센터의 존재가 감사해지는 순간이다.



살다보면 같은 마음일리는 없겠으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곳은 참 살고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차가 없어도 불편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갖춰진 대중교통 체계는 물론이거니와 겨울이라는 것이 존재한 역사가 없다는 것 역시 참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에는 잘 가꿔진 숲이 많다. 정말 많다. 어딜 가나 우거진 녹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단언컨데 이 동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여기에도 온통 우거지고,



저기에도 온통 우거졌다. 덕분에 사방 천지 인공적인 조형물로 쌓아올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넘친다. 적어도 잠시 스쳐가는 여행객의 눈에는 그러했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들 중 그렇지 않은 곳이 더 귀하지 않을까 싶다. 싱가폴 역시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다. 그런 만큼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을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디선가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다만.. 여하튼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는 교회도 있다.



적당히 반올림 하여 역사가 200년에 가까운 이 건물은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꾸준한 관리와 끊임없는 개보수를 거쳐왔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지어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깨끗한 외관은 감탄을 저절로 만들어낸다.



이 역시 없으면 섭섭할만큼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자 꾸준히 나를 언짢게 만드는 것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두 발의 원자폭탄에 꺾이기 전까지 기세가 맹렬했던 대동아 공영권의 망령, 싱가폴 역시 피해가지 못하였다.



조금 갑작스레 만난 손님, 무려 40년 전 싱가폴을 찾았던 평양예술단의 흔적이다.



한국처럼 세련되지 않았고 그리 저렴한 가격도 아니기는 하다만 이곳에도 PC방이 있다. 이 당시에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컴까기'라는 이름의 유즈맵을 깨는 것에 미쳐있었는데, 타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지라 급하게 찾아간 곳이다.



이곳의 날씨는 유난히 변덕스럽다. 하루의 시작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함께였다고 해도 마음을 쉽게 놓아서는 안된다.



지친 마음을 추스리고 싶었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발걸음이 닿는데로 걷고 또 걸었는데, 금새 찌푸린 표정을 짓는 하늘은 그나마도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결국은 퍼붓기 시작한다. 노래 한 곡 들었을 뿐인데, 잔뜩 쏟아부은 빗물은 이미 길섶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잔뜩 고여 내 앞길마저 방해한다. 되는 일이 없을 때는 뭘 해도 안되는 것 같아 괜스레 서글퍼지고 말았다.



싱가폴은 말라카해협의 끝나는 곳에 위치해 동과 서를 잇는 요충지라는 이점을 등에 업고 일찍이 무역항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곳이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세계에서 2번째로 물동량이 많은 항구이며 환적 물량 기준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그런 덕분에 컨테이너를 실어나르는 크레인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나는 언제쯤 내 가방을 실은 컨테이너를 볼 수 있으려나 한탄 아닌 한탄을 하면서 이곳을 지났는데, 두 달 뒤면 내 가방을 실은 두 번째 컨테이너가 한국을 향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크루즈선이 한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이곳에서 처음 본 듯 하다. 멀리서 보아도 대단한 위용이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리고 지친 심신을 이끌고 도망나온 처지라고 하여도 싱가폴까지 와서 이곳에 발걸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마 누군가의 SNS에서 한 번 쯤은 보았을 풍경이 자연스레 연상될 것이다. '랜드마크'가 지녀야하는 미덕의 교과서와도 같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되시겠다.



'인피니트 풀'이라는 이름의 옥상에 만들어진 수영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카지노로 훨씬 더 유명하고, 이곳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역시 카지노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싱가폴의 국부라고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는 본인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싱가폴 땅에 카지노가 들어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는데, 그런거 없다. 아버지의 눈에 흙을 손수 뿌려드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 아버지의 뒤를 이은 리센룽 총리는 이 호텔에 카지노를 만들었고, 지금도 싱가폴 경제가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을만큼 그 효과는 강력했다.



그런고로 경험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신성장동력의 위대함을 경험하기 위하여 내려앉은 어둠을 벗삼아 친구와 함께 이곳을 다시 찾았다.


딱히 잘한게 있어서 찾은 싱가폴은 아니었던지라 큰 돈을 갖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10만원 정도를 칩으로 바꿨는데,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땄을리는 당연히 만무하고 밥 한 끼 정도를 잃었던 것 같다. 너무나 상투적이지만,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넓은 공간은 카지노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빼곡하다. 그 풍경은 마치 돈을 물쓰듯 한다는 관용어구를 눈 앞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는데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



마침 출장차 싱가폴을 방문한 고등학교 선배 한 분도 같이 자리할 수 있었다. '아고다'같은 호텔 예약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고 있는 형은 나와 친구를 능수능란하게 인피니티 풀 옆에 자리한 술집으로 이끌었다. 호텔에 숙박을 하지 않아도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구글의 힘을 빌려보니 '세 라 비'라는 이름의 루프탑바가 인피니티 풀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우리가 찾은 이곳이 같은 곳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비싼 술을 얻어먹겠거니 들떠있었던 것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 바람에.



숙박을 하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반드시 찾아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큼 높은 곳에서 도시를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싱가폴에는 많지 않은데 그 경관은 말로 표현하거나 사진으로 옮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야성, 유유히 유람하는 배들의 불빛이 싱가폴의 밤바다를 환히 밝힌다. 그 너머로는 인도네시아가 보인다. 아주 생소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내 시야안에 담고 있으니, 조금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아쉬운 마음이 끊임없이 끓어올랐다. 결국 나는 이곳에서 내 가방을 위한 힘을 한 번 더 내보기로 했다.



그렇게나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이 홀가분하다. 다시 시작이라는 긴장과 흥분을 안은 채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저 아쉽기만 하다.



창이공항은 정말이지 바람직함의 표본 그 자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너무나 잘 갖춰진 편의시설은 물론이거니와 음식들의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심지어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 명성은 괜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큰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다시 만납시다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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