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다. 대만 타이중, 첫번째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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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 '18.03.07(수) ~ '18.03.11(일)


갑작스럽게 여자친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퇴사한 기념으로 대만 여행을 가볼까 싶은데 나도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사실 내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특가도 이런 특가가 없으니 꼭 합류하란다. 비행기가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 보니 내일 오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시간이 화요일 오후 두 시니깐 딱 스물여섯 시간이 남았다.


나는 대만의 여배우 천옌시를 좋아한다. 그래서 대만 곳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많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스크린 속 천옌시의 미모와 발랄함을 제외한 대만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둔 적이 없다. 그런 나에게 내일 대만으로 떠나자니, 너무 갑작스럽다. 그나마도 내일 떠나는 비행기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타이중이라는 곳으로 향할 예정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들어본 적이 있긴 하다. 언젠가 네이버 스포츠 뉴스에서 타이중으로 전지 훈련을 떠나는 야구 팀들의 이야기를 본 듯하다. 내가 야구팬이었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도 없었으면 타이중은 완벽하게 미답의 영역일 뻔했다.


너무나 바쁜 나머지 일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다. 걱정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여자친구의 손은 내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보다 빨랐다. 정말 예정에도 없던, 생각지도 않았던 대만행은 그토록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보딩 브릿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까지도 노트북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하늘 위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가보는 동네에 대한 호기심은 일더미에 파묻혀 딱 미쳐버리기 직전인 나의 일상을 이겨냈다. 나와 여자친구를 타이중으로 실어나를 비행기가 눈앞에 등장했다.



유난히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아무리 하늘로 치닫아도 희뿌연 장막이 걷힐 생각을 않는다. 마침내 맞이한 파란 하늘이 어찌나 반갑던지.



참으로 유난스러웠다. 정신을 한 곳에 온전히 쏟기 힘들 정도로 요란스러운 비행기 덕분에 하늘에 떠 있는 내내 일은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키보드만 잡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고, 피로감만 잔뜩 쌓은 채 대만 땅을 밟았다. 마중 나오는 활주로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상상하던 이상으로 목가적이다. 출발 전에 급하게 집어넣은 상식에 따르면 타이중은 대만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공항에서는 그런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공사 중이라고는 하는데 지금은 없다. 타이중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다. 참으로 간만에 기차 아닌 것에 몸을 실어 공항을 빠져 나온다. 시작부터 완벽하게 지쳐버렸다. 창문이 열리지 않는 타이중의 버스는 사람 사는 냄새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담배냄새에 찌든 시트가 굉장했던, 그렇게나 기를 쓰고 타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소나타2가 갑자기 떠올라 뜻하지 않게 유년기를 잠시 추억했다.


P.S.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오늘은 2022년 12월이다. 처음 대만 땅을 밟았을 때 흔적만 존재하던 지하철은 완공된 지 오래다. 이 시국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2021년 4월, 타이중 최초의 도시철도가 개통했다. 다만 공항철도 소식은 아직이다. 계획은 있으니 언젠가는 이어질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 최초 계획이 수립된 것은 1998년이지만 이제 겨우 하나 뚫었다. 티스푼이 아니라 이쑤시개로 공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누가 밥숟가락이라도 갖다줘야 될 것 같다.



인천에서 타이중까지 날아오기를 두 시간 반쯤 걸렸고 타이중 공항에서 숙소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한국과 대만 사이가 생각보다 가까운 탓인지 공항과 숙소 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먼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숙소에 도착하였다. 오늘부터 이틀간 보금자리가 될 곳은 타이중역에서 도보 10분이 걸리지 않는 입지가 장점인 '키위 익스프레스' 되시겠다.



토토로 형제가 숙박객을 맞이하는 이곳은 이 동네에서 꽤 명성이 있는 숙소인 듯하다. 얼마나 신뢰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2016년에는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무슨 상도 받았다. 이 정도라면 이 동네에서 평균 이상은 하는 숙소일테다.



비록 평일이기는 했지만 두 명 합쳐서 4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숙소라니,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었고 정갈하다. 불평은 사치고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 같았다. 간단히 짐을 풀고는 밖을 나섰다. 원색으로 화려함을 발하는 대만의 밤거리는 홍콩의 그것과 닮아 있는 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정한 구석이 있다.



대만의 밤은 짧다. 어스름이 지면 적막이 발을 맞춰 나란히 내려 앉는다. 아홉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거리 곳곳은 벌써부터 침묵에 잠기었다.



대만 영화를 그렇게 봤으면서도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야시장이 그렇게나 유명한 대만이다.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걷다가 발길이 닿은 이곳은 '충효 야시장'.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곳이 아닌 것인지, 그 넓은 거리에  중국어가 아닌 목소리는 나와 여자친구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향긋하게 빵 익는 냄새, 코를 쥐어 뜯어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취두부 냄새가 뒤섞인 거리를 걷다 보면 길게 늘어선 줄이 종종 보인다. 이른바 '현지인 맛집'이라고 일컫는 곳이다. 줄이 있는 곳을 모조리 체험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들 입맛에 맞다고 우리에게도 맛있다는 보장은 없다. 현지인 맛집은 여행객 맛집과 동의어가 아니다. 주문 전에 한 번쯤은 고민해 보자. 내가 정말 이 동네 음식과 궁합이 맞는지 말이다.



주린 배가 사정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지만 대만에서의 첫 끼를 결코 쉽게 타협할 수 없다. 기합 한 번 넣고는 야시장 한 바퀴를 죽 둘러보았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하다. 포항의 죽도시장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 없는 익숙한 풍경에 여자친구와 나는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을 날아와 포항으로 여행을 왔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대만까지 건너오느라 고생한 우리에게 맥주가 함께하는 술상을 선물하기로 했다. 섬나라인 대만은 바다를 끼고 도시들이 발달했다. 그 덕분에 웬만한 도시에서는 해산물을 원없이 먹을 수 있는데, 타이중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야시장의 포장마차에는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다. 우리가 선택한 재료가 어떤 요리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주방장님 마음 먹기에 달렸다. 이곳에는 정해진 메뉴가 없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이곳은 지나치게 현지다. 그래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혹시나 올 생각이 있다면 중국어 할 줄 아는 친구를 섭외하던가 음식 주문은 운에 맡길 각오를 하고 오자.



총 네 가지의 요리가 상에 올라왔다. 조개 볶음과 시금치 볶음, 박하향이 나는 면 요리가 하나 있었고 파를 돼지고기로 말아 구워낸 음식까지.


왜 대만이 미식으로 유명한 곳인지 첫 날 저녁부터 제대로 배웠다. 나는 조개 볶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먹은 것은 간이 너무나 절묘했다. 3천 원도 하지 않는 현지 맥주 역시 살짝 달콤한 향과 함께 시원하게 목을 넘어가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착한 가격까지 사랑스러웠다. 요리 네 접시와 맥주 두 병을 합쳐서 한국 돈으로 25,000원도 나오지 않았다.



삼삼오오 둘러 앉아 지나간 하루를 씻어 보내는 현지 사람들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번진다.



좋은 분위기에 취한 타이중의 밤은 첫날부터 완벽하게 즐겁다.



저녁을 먹기 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찻집에서 밀크티를 한 잔 시켰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했다. 현지인의 맛집이 지구촌 사람들의 맛집은 아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 완벽하게 어둠에 잠겨버린 거리는 시침과 분침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감각마저 무뎌지게 만들었다.



익숙한 듯 어딘가 낯선 동네 타이중, 거리에 내리는 고요와 함께 첫날 밤이 조용히 잠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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