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다. 제주도, 두번째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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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17.02.22(수) ~ '17.02.24(금)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게스트하우스는 널찍하고 편했다. 덕분에 간밤이 안락했다. 난방을 까먹으셨는지 조금 춥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녁 아홉 시만 되어도 동네 전체가 암흑에 잠기는 곳이다. 아침 여덟시라고 문을 연 식당이 있을 리가 없다. 웬만해서는 아침을 먹지 않지만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아침을 먹기로 한다.



제주도의 편의점에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육지에서 만들어서 배를 타고 오는 건지 신선식품이 매일 채워지지 않는다. 훗날 알아낸 바에 따르면 제주도 편의점에 납품되는 도시락은 제주도 내에서 자체 생산 되는 것이긴 한데, 어찌 됐든 입고 주기가 매일이 아니라는 건 신기한 일이다. 투덜거릴 생각은 없다. 제주도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편의점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 마음을 겨눌 길이 없다.



나와 동생이 걷게 될 제주 올레길 16코스는 애월항 언저리에서 출발해서 무려 16km를 걸어야 완주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아침이 밝아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이 멈출 리 없으니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왔고, 나와 동생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내포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 10년 만에 제주도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서 신이 난 동생과 나는 이내 실성을 하고 말았다. 칼날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듯한 바닷바람은 걸은 지 5분도 되지 않은 나와 동생을 사지로 몰고 있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들러 잠시 몸을 녹이기로 한다. 근데 하필 알라스카 인 제주. 여기가 제주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라서 지은 이름이라면 아주 완벽한 작명이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으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란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시킨 한라봉차는 나보다 미니언놈이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죽자고 달려드는데 막을 재간이 없다. 정말 한라봉으로 만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맛있는 유자차다. 어릴 때 설탕에 잔뜩 절여진 유자청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우려낸 맛있는 유자차. 그 유자차 맛이다.



이곳에는 안타깝게도 북극곰 두 마리가 학대를 당하고 있다. 고향 생각이 간절한지 녀석들은 그들의 힘으로 열어 젖힐 수 없는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관조하는 것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소일하는 듯하였다.



'엄마.. 우리는 언제쯤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나요..?'

'넌 자유으 모미 아냐. 여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계쏘..옥..'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침내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피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은 여전하였지만.



북극곰이 세 마리나 학대를 당하고 있는 이곳은 참혹한 동물권유린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고발하기 위해 다음 제주도 여행길에 반드시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잰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일을 하러 온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진도 놓치지 않는다. 제주도 땅을 밟은 지 열여섯 시간이 다 돼서야 마수걸이 사진을 개시하였다.



볕이 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바람은 매섭다. 카페 문을 나선 지 3분도 되지 않아 다시 실성해버린 동생과 나. 넋 나간 웃음과 함께 제주의 겨울 바다를 만끽해 본다.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럴 정신도, 틈도 없이 셔터만 눌러대기 바빴다.



사진만 봐도 추위가 전해지는 듯하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십 년 전 배를 타고 제주도에 건너와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굴려대던 나의 시선 끝에 장엄하게 펼쳐지던 모습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의 자연은 한결같이 아름답다. 추운 것만 빼고.



포말이 항구를 삼킬 듯 일렁이며 절벽을 때려대는 매서운 파도는 쉴 새 없이 해안가로 몰려 들었다. 실성한 정신줄을 붙잡을 새도 없이 미친듯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한결같다. 절벽의 끝에 올라 장엄한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오마하 해변에 상륙작전을 앞둔 연합군 병사가 된 듯하여 괜히 비장한 기분이 일.. 새도 없이 그냥 춥다. 정말, 무척, 너무나 추웠다.



이 얼마나 좋은가. 제주의 겨울은 여러분을 반긴다. 반드시 떠나자. 제주는 겨울에 떠나는 것이 제맛이다.



말의 성찬이 필요 없다. 가장 좋은 제주는 역시 겨울에 떠나는 제주이다. 차도 필요 없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놔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법. 가방의 모습을 또 한번 뷰파인더 안에 잡아 보기로 한다. 하지만 바람에 날려갈 뻔한 모습을 두어 번 본 이후로는 겁이 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제주에는 재미난 커피집이 있다.



절벽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올레길임을 알리는 표식들이 이곳 저곳에 매여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실어 나르면서,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 위에 살포시 내려 앉기도 했을 저 조그마한 표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춥다. 너무 춥다.



길을 걷다 만난 강아지 녀석들. 꽤나 오랫동안 함께 지낸 벗들인가 보다.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울퉁불퉁 솟아있는 돌부리 위를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이 추워 보였다. 하.. 추워라..



바다를 끼고 조성된 올레길의 모습이 꽤나 단조롭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종종 발걸음을 멈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에 새로 마주한 작은 어항.



아주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내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초점 없이 흩뿌리는 것 같았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추위에 지쳤던 탓인지 그 잠깐의 볕조차도 너무나 반갑게 느껴졌다.


차갑게 식은 몸을 어설프게나마 데우면서 지도를 확인해 본다. 굳이 이 추운 겨울 바닷바람을 뚫고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던 이유인 구엄리 돌염전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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