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자료 · 2026년 8월

조세이 탄광
長生炭鉱 · ちょうせいたんこう

1942년 2월 3일,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의 해저 탄광이 무너졌다.
183명이 죽었고 그중 136명이 조선인이었다. 유해는 84년째 바다 밑에 있다.
이수경·유노 유코의 학술논문을 중심에 놓고,
한국 정부 산하 재단 자료와 일본 시민단체 기록, 최근 보도를 대조해 정리한 글이다.

들어가며이 글이 무엇에 근거하는가

여러 자료를 봤지만 가장 많이 기댄 것은 다음 논문이다. 우베 탄전 전체의 통계 자료를 직접 다루고 있어서, 조세이 탄광이 어떤 규모의 어떤 탄광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글이었다.

논문우베의 조세이 탄광과 전시 중의 조선인 노동자
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
저자이수경 (李修京) · 유노 유코 (湯野優子)
소속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인문사회과학계
유노 유코 — 아사히신문사 야마구치 총국
게재도쿄가쿠게이대학 기요 인문사회과학계 Ⅰ 제59집, 105~118쪽
2007년 8월 31일 수리, 2008년판 게재

여기에 다음 자료를 하나씩 대조했다.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 조세이 탄광」 항목. 한국 정부 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에 낸 보고서(허광무 조사책임자)를 인용해 작성된 자료다.
  • 일본 시민단체 새기는 모임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의 공식 기록
  • 일본어 위키백과의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항목, 그리고 2024년부터 2026년 사이의 각 언론 보도

먼저 알아둘 것

자료마다 숫자가 다른 항목이 여럿 있다. 사고가 난 시각도, 안전층 규정도, 조선인 사망자 수도 자료에 따라 조금씩 갈린다. 어느 하나를 골라 적는 대신 다른 채로 적어두었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마지막 부록에 따로 모아뒀다. 현장에서 다른 설명을 듣더라도 당황할 일이 없도록.

1부조세이 탄광이란 무엇이었나

우베는 석탄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우베 탄전은 야마구치현 일대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석탄도 가장 많이 캔 탄전이었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생산량의 90퍼센트가 해저 탄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바다 밑으로 갱도를 길게 뻗어 그 아래의 탄층을 캐는 방식이었다. 전성기였던 1940년에는 우베에만 탄광이 약 59개 있었다.

그중에서 조세이는 중간 규모였다

1940년(쇼와 15년) 우베의 주요 탄광 — 후쿠오카 광산감독국 자료
등급탄광생산량(톤)노무자광업권자
1급오키노야마1,239,3815,560오키노야마탄광 주식회사
1급히가시미조메1,005,5994,515히가시미조메탄광 주식회사
3급모토야마224,5661,673우베광업 주식회사
3급조세이153,309992 야마다 신마쓰 (山田新松) — 개인
4급오키우베112,517853 시노자키 도메키치 (篠崎留吉)

널리 퍼진 오해 하나

한국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조세이 탄광을 우베흥산 (宇部興産) 소유라고 적고 있는데, 위 표에서 보듯 광업권자는 야마다 신마쓰라는 개인이다.

우베흥산은 사고와 같은 해인 1942년에 오키노야마 탄광과 우베질소, 우베시멘트, 우베철강소가 합쳐져 새로 만들어진 별개 회사다. 재단 자료의 「관련 기업·기관」 칸도 과거와 현재가 모두 비어 있는데, 이는 책임을 물을 승계 기업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오래도록 어두운 채 남아 있었던 구조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20년 전에 이미 한 번 물에 잠겼던 탄광이다

  • 1914이소베 게이사쿠 (礒辺啓作)가 문을 열었다. 해저 탄전이다
  • 1922.05수몰로 채굴 중단 — 1942년이 첫 수몰이 아니다
  • 1932.11제1갱에서 채굴 재개
  • 1940야마다 신마쓰에게 넘어가고, 요리타카 후치노스케가 경영을 맡는다
  • 1941생산량이 정점에 이른다. 우베 탄전에서 3위
  • 1942.02.03제1갱 수몰. 183명 사망
  • 1942.06제2갱에서 채굴 — 사고 넉 달 뒤
  • 1942.11제3갱에서 채굴 — 사고 아홉 달 뒤
  • 1945일본의 패전과 함께 폐광

1922년에 이미 물에 잠긴 적이 있는 탄광이었다. 그걸 알면서 1932년에 다시 팠고, 1942년에 183명이 죽었으며, 그러고도 넉 달 뒤에 옆 갱에서 다시 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바다 밑에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랬다.

갱도의 구조와 피야

갱구에서 앞바다 쪽으로 피야, 그러니까 통기구를 지나 1,000미터 남짓 나간 지점부터 남남서 방향으로 104도 각도로 곧게 뻗은 갱도가 있었다. 이것을 전차갱도 (電車坑道)라고 불렀다.

피야의 형태
직경 3~4미터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물 두 개
지금 있는 자리
해안에서 수백 미터
해면 위로 솟아 있다. 탄광이 거기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상 흔적이다

2부「조선탄광」이라 불린 곳

야마구치현에 탄광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조세이는 조선인 노동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현지에서 아예 조선탄광 (朝鮮炭鉱)이라고 불렸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세이 탄광에서 노동자 모집을 맡은 사람이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다키모토 마스오 (瀧本益雄)와 에모토 가쓰타로 (江本勝太郎)다. 조선 사정에 밝은 사람을 모집 담당으로 앉힌 결과, 다른 탄광보다 조선 출신을 훨씬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왔나 — 「모집」의 실제 절차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은 조세이 탄광의 동원 방식을 「모집」으로 분류한다. 징용영장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모집」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면 우리가 아는 모집과는 상당히 다르다.

사업장이 필요한 인원을 정한다
→ 부현장관에게 모집을 신청하고 후생성이 심사한다
총독부가 모집할 도(道)에 인원을 할당한다
→ 후생성과 부현장관을 거쳐 사업장이 허가서를 받는다 (여기까지 다섯 달에서 일곱 달)
→ 모집원이 조선으로 건너가고, 총독부에서 지정 도청, 지정 군청, 지정 면사무소로 내려간다
면사무소와 구장, 경찰서 또는 주재소, 면의 유력자가 협력해 모집한다

회사가 광고를 내고 지원자를 받는 구조가 아니다. 총독부가 도에 인원을 할당하고, 말단에서 면사무소와 경찰이 그 숫자를 채우는 방식이다. 관련 연구가 이것을 그냥 「모집」이 아니라 「할당모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얼마나 왔나

연도동원 계획실제 동원
1939450249
1940800483
1941350430
1942년 6월 기준 누계1,630 1,258명 이상(추정)
출신지 (동원자 1,258명 기준)
경상북도 831명
약 66퍼센트. 나머지는 주로 충청남도
이동 경로
부산 → 시모노세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조세이 탄광에 도착했다

이 두 숫자는 섞으면 안 된다

위의 경상북도 831명동원된 1,258명을 기준으로 한 숫자다. 뒤에 나오는 대구·경북 73명사망한 136명을 기준으로 한 숫자다. 모집단이 다르므로 나란히 인용하면 틀린 말이 된다.

도착한 다음

교습나흘
보조작업석 달
임금 방식정액제(임금 × 작업일수) 또는 청부제(청부단가 × 작업일수)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재단 자료에 기록된 통제 실태는 이렇다.

  • 울타리로 둘러싸인 기숙사에서 지내도록 강요받았다
  • 도리시마리 (取締)라고 불리는 감독관이 기숙사 출입을 통제했다
  • 탈출을 막으려고 숙소 출입구를 ㅁ자 모양으로 만들고 한 곳만 쓰게 했다
  • 같은 숙소 안에서도 다른 동으로 오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 임금을 현찰로 주지 않고 강제저축 형태로 지급했다. 이탈을 막는 장치였다
  • 2교대로 일했고, 작업 시간 동안에는 탄광 밖으로 일절 나올 수 없었다
  •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면 사무실로 끌려가 구타당했다

그리고 다음 한 문장이 사고 당일과 곧바로 이어진다.

탄광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도 일본인 관리자의 지시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 조세이 탄광」

도망친 사람이 얼마나 됐나

1939년 전국 평균
2.2%
이주자 19,135명 가운데 도주 429명
1939년 야마구치현
21%
이주자 238명 가운데 도주 51명. 전국 평균의 열 배다

내무성 특고과 조사에 근거한 수치다. 자유롭게 왔고 조건이 약속대로였다면 다섯 중 하나가 도망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도망친 다음이 더 무겁다.

조선인 노동자는 광부로서만이 아니라 탄광 경영자 측에도 가담해 있었고, 동포가 도망갔을 때는 조선인 책임자가 대신 맞았다. 그들은 일본인에게서만이 아니라 동포에게서도 차별받는 상황에 놓였다. 이수경·유노 유코(2007), 생존자 증언에 근거

증언 — 설도술 (薛道術), 1918년생

2007년 65주기 추도식 때 논문 저자가 직접 받은 증언이다. 당시 여든아홉이었다.

1938년경, 고향 파출소에 네댓 명이 모아졌고 부산에서 약 70~80명이 함께 배를 탔다. 갑자기 헬멧을 쓰게 하고 작은 배로 옮겨 조세이 탄광으로 가게 됐다. 도망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수경·유노 유코(2007)

앞에서 본 모집 절차의 마지막 칸이 「주재소」였다. 주재소가 곧 파출소다. 문서와 증언이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3부1942년 2월 3일

사고 지점
갱구에서 1킬로미터 앞바다
해저 갱도의 천장이 무너져 바닷물이 들어왔다
사망
183명
조선인 136명(약 7할)과 일본인 47명

규정을 무시하고 해저에 붙여 팠다

자료필요한 안전층실제 굴착
위키백과 (한국어·일본어)해저에서 47미터 이상최심부 37미터
일부 보도·해설 글안전층 40미터 이상30미터까지

보다시피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다. 아래쪽 수치는 여러 해설 글에 나오지만 원 출처가 어느 문헌인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공통점은 분명하다. 규정된 안전층을 남기지 않고 해저에 너무 가까이 팠다는 것이다. 규정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미 다이쇼 시기에 감독서가 해저채굴제한사항 (海底採掘制限事項)을 통달해 둔 상태였다. 거기에 태평양전쟁의 증산 압력이 겹쳤다.

이 근처 탄광은 자주 「바레테」(수몰사고를 이르는 말) 있었다. 하지만 채굴은 군의 명령이었고 사람의 죽음도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사고 목격자 증언 · 이수경·유노 유코(2007)

사고 직후

붕락 지점에서 갱내로부터 공기가 고보고보 나오고 물을 뿜어올렸다. 공기가 없어질 때까지 한 달쯤 계속됐을까. 배에서 흙주머니를 던져 구멍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갱구까지 물이 와 있었다. 사고 목격자 증언 · 이수경·유노 유코(2007)

갱구는 곧 헌병대가 봉쇄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직후라 정보통제가 이루어졌고, 그 탓에 전쟁이 끝난 뒤로도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군이 관여한 정황도 드러난다. 사고 당시 헌병대에 복무 중이던 이노우에 마사토 (井上正人)는 아버지가 조세이 탄광의 노무책임자였는데, 관할청인 규슈보안석탄국에서 파견되어 사고 처리를 담당했다.

같은 탄전인데 대접이 달랐다

연도탄광사망사회의 대응
1915히가시미조메235 신문 대서특필 · 천황과 황후의 하사금 · 전국에서 의연금
당시 일본 국내 최대의 해저탄광 수몰사고
1921신우라34 해저채굴연구회가 발기해 유족구호회를 조직하고 우베 시민이 의연금을 모았다
1942조세이183 헌병대가 갱구를 봉쇄하고 정보를 통제했다
최근까지 언론에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27년 사이에 같은 탄전에서 일어난 같은 종류의 사고다. 규모 때문에 대접이 갈린 것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죽은 사람의 7할이 조선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때가 전시였다는 점뿐이다.

공식 통계마저 틀리게 적었다

『야마구치 탄전 삼백년사』 (山口炭田三百年史, 1969)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長生炭鉱 昭和14·2·6 坑口より1010m 以層坑道 死者183 海水侵入 조세이 탄광, 쇼와 14년 2월 6일, 갱구에서 1010미터, 사망 183, 해수 침입

연도도 틀렸고 날짜도 틀렸다. 쇼와 14년은 1939년인데 실제로는 쇼와 17년, 그러니까 1942년 2월 3일이다. 국가가 만든 산업재해 통계에서조차 이 사고는 제대로 적히지 않았다.

183명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확정됐나

회사 기록도 관청 기록도 아니었다.

① 조세이 탄광 부근 사이코지 (西光寺)의 위패에 있는 이름
② 후쿠오카현에 있던 순직산업인명부 (殉職産業人名簿)에 기재된 이름
→ 두 명단의 대부분이 일치했다

절의 위패와 산업 명부를 맞춰본 결과다. 1990년 7월 아사히신문이 이 대조 결과를 공표하면서, 강제동원이라는 사실과 조선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사고로부터 48년 뒤의 일이다.

살아남은 사람들

사고 발생 이후 많은 조선인 노무자가 조세이 탄광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었다. 이들은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일본 내 다른 지역의 탄광, 군수 공장에서 노무자 생활을 이어 갔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4부이름을 되찾는 데 걸린 시간

시작은 향토사가 한 사람이었다

야마구치 다케노부 (山口武信). 우베시의 역사 교사이자 향토사가였다. 1976년에 『우베 지방사 연구』 (宇部地方史研究) 제5호에 「탄광에서의 비상 — 쇼와 17년 조세이 탄광 재해에 관한 노트」를 발표했는데, 183명 가운데 136명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운동가가 아니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의 역사를 파던 지역 역사 교사였다. 시민단체가 생기기 15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1991년, 같은 지방사 연구지 제19호에 관련 논문 세 편이 한꺼번에 실린다. 야마구치의 「노트 II」, 누노비키 히로시가 회사 측 문서를 판독한 「집단도항선인부기록을 읽는다」, 그리고 희생자 이름을 복원한 「희생자 명부의 종합」이다. 바로 그해에 새기는 모임이 결성된다.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1.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울 것
  2. 피야를 보존할 것
  3. 증언과 자료를 모아 정리할 것

회칙에 적힌 목적은 이렇다. 수비상 (水非常)을 역사에서 지우지 않고 성실히 마주함으로써, 조선반도 사람들 및 재일코리안과의 우호와 친선을 기르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

2013년 제막식에서 있었던 일

22년이 걸려 183명 전원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완성했다. 공적 지원 없이 민간의 힘만으로 해낸 일이었다. 그런데 제막식 날, 유족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이걸로 운동을 그만두려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가족의 유골을 고향에 데려갈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2013년 추도비 제막식에서 유족의 말 ·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 회고
2013년에 유족에게 규탄받고, 비로소 「유골 수집·반환」은 우리 일본인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자각했습니다. 2014년에 새기는 모임을 유골 발굴을 위한 책임 있는 회로 조직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井上洋子) 공동대표

22년 걸려 세운 비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유족의 한마디로 알게 된 것이다. 2014년의 그 조직 개편이 10년 뒤에 갱구를 여는 일로 이어진다.

연표

  • 1976야마구치 다케노부가 지방사 연구로 사고를 발굴한다
  • 1980년대 중반증언 수집이 시작된다
  • 1982조세이 탄광 수난자의 비 건립 — 조선인 이름은 새겨지지 않았다
  • 1990.07아사히신문 보도. 명부와 위패 대조 결과가 공표된다 (사고 48년 뒤)
  • 1991.01새기는 모임 결성. 대표는 야마구치 다케노부
  • 1991.08조세이 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 결성
  • 2001.08잠수해 갱도에 들어가 유골 수집을 시도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 2004한국 정부 진상규명위원회 발족, 조사단이 일본을 찾는다
  • 2007.01한국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 완성 (허광무 조사책임자)
  • 2013.02183명 전원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 준공. 전액 민간, 22년이 걸렸다
  • 2014유골 반환을 목표로 조직을 다시 만든다
  • 2021.01명패를 나무패에서 석판으로 교체한다 (사고 79년 뒤)
  • 2023.04~일본 참의원에서 유골 반환 문제가 반복해 거론된다
  • 2024.09~10자력으로 굴착해 갱구를 찾아내 연다. 82년 만이다
  • 2025.08본갱도에 처음 진입해 유골 4점을 발견한다
  • 2025.11국회의원이 특별법안을 발의한다
  • 2026.01한일정상회담의 공식 의제가 된다
  • 2026.02.06두 번째 두개골을 수습한다
  • 2026.02.07대만인 잠수사가 사망한다. 57세, 애칭 빅터. 산소중독에 의한 경련이었다
  • 현재유족의 의향을 최우선으로 두어 잠수조사 재개 논의를 1년간 보류한 상태다.
    수습된 유해의 유전자 감정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2026년 2월 7일

대만에서 온 잠수사가 갱도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섯 명의 전문 잠수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유족이 전한 고인의 뜻은 「더 많은 분들의 힘이 되고 싶다」였고, 장례를 치른 뒤 유족은 시민단체에 「활동을 계속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름 표기가 두 갈래로 갈린다

보도에 따라 쉬웨이 (徐巍)와 웨이슈 (魏修)로 다르게 적힌다. 앞의 표기는 장례와 유족 귀국까지 취재한 도쿄신문 쪽이다. 애칭 「빅터」와 나이 57세는 어느 보도에서나 같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유족은 2026년 2월 13일 유골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갔다.

5부답사 정보

가는 길

구글 지도에서 아래 이름으로 검색하면 바로 잡힌다.

長生炭鉱殉難者の碑
조세이 탄광(장생 탄광) 수몰 희생자 추모비
장생탄광(조세이 탄광) 피어 1

앞의 둘은 같은 곳, 곧 추도광장이다. 「피어 1」이 바다에 솟아 있는 배기구, 본문에서 말한 피야다.

세 이름을 미리 지도에 저장해 두고 가는 편이 낫다. 갱구와 추도광장은 붙어 있지 않다. 걸어서 15분 남짓 떨어진 거리고, 한 곳에 도착해서 다른 곳도 근처에 있으려니 하면 길을 잃는다.

도코나미역은 무인역이다

JR 우베선 도코나미역 (床波駅)에서 내린다. 2012년 9월부터 역무원이 없어서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다. 승강장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고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으니, 내린 쪽이 바다 반대편이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밖의 정보

당시 주소야마구치현 요시키군 니시키와촌 1456번지
山口県吉敷郡西岐波村1456番地
추도비 건립2013년 2월. 2021년 1월에 명패를 나무패에서 석판으로 바꿨다
문의새기는 모임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chouseitankou.com

추도비

왼쪽에 「한국·조선인 희생자」, 오른쪽에 「일본인 희생자」라고 새겨져 있다. 한 돌에 같이 있다. 1982년에 세운 첫 비석에는 조선인 이름이 아예 없었으니, 여기까지 오는 데 31년이 더 걸린 셈이다.

피야

추도광장에서 바다 쪽을 보면 콘크리트 기둥 두 개가 해면 위로 솟아 있다. 배기용 수직갱이었고, 지금은 탄광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상 증거다. 그 아래에 183명이 있다.

부록자료 간에 어긋나는 것들

본문에서 하나로 정리하지 않고 남겨둔 항목들이다. 현장 안내나 다른 글에서 다른 숫자를 보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항목자료마다 이렇게 다르게 적혀 있다
사고 시각 한국어 위키오전 6시경 새기는 모임6시경 출수, 8시경 수몰 이수경 논문오전 9시 반경
안전층 규정 위키백과47미터 필요 / 37미터 굴착 일부 보도·해설40미터 필요 / 30미터 굴착
조선인 사망자 대부분의 자료136명 지원재단130여 명 이수경 논문 본문 한 곳133명
대구·경북 사망자 일본어 위키73명 한국어 위키78명
경영자 이름 이수경 논문요리타카 후치노스케 일부 보도요리타카 하야타 일본어 위키하야부치 라이조
제1갱 폐쇄 지원재단1942년 1월
사고일과 어긋난다
그 밖의 자료1942년 2월 3일
한국 정부 보고서 연도 재단 참고문헌2006년 도서관 서지2007년 8월 발간

반대로 동원 인원 1,258명 이상, 사망 183명, 조선인 약 7할이라는 숫자는 어느 자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광업권자가 개인이며 우베흥산이 아니라는 것도 1940년 감독국 표로 확정된다.

참고자료 목록

  1. 李修京·湯野優子, 「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 東京学芸大学紀要 人文社会科学系Ⅰ 제59집, pp.105~118 (2007년 8월 수리)
  2.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죠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허광무 조사책임자, 진상조사보고서 4-4, 2007
    발간등록번호 11-1655000-000015-01 · NCID BB13572085 · 원문은 도서관 열람 필요
  3.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 조세이 탄광」
  4.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chouseitankou.com)
  5. 長澤秀, 「山口縣・長生炭鉱(株)と朝鮮人強制連行 — 会社側文書を中心に」, 『海峡』 제16호, 1992
  6.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2020
  7. 山口武信, 「炭鉱における非常 — 昭和17年長生炭鉱災害に関するノート」, 『宇部地方史研究』 제5호, 1976
  8. 『山口炭田三百年史』, 히로시마통상산업국 우베석탄지국, 1969
  9. 일본어 위키백과 「長生炭鉱水没事故」 및 2024~2026년 각 언론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