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만들다. 스물

조회수 1993

시작


7월 6일. 갑자기 지구의 자전이 멈추거나 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는 않았기에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사를 지내고, 펀딩 시작 버튼을 누르면서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는 상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아침은 영 생뚱맞게 짐을 옮기고 상자를 포장하는 일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자친구가 이사를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면서 옆집 이웃과 으레 벌어지는 조금의 실랑이와, 조금의 노동으로 아침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어간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펀딩을 시작하기 며칠 전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공개된 장소에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매일 밥만 축내는 듯 하였기에 가방을 만들고 있다고 남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그동안은 썩 내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길었던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올린 짧은 글 하나. 감사하게도 너무나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고 그 속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데다가 결코 저렴하다 할 수 없는 가격대의 가방을 과연 누가 선뜻 구매할 것인가 정말 많은 걱정이 되었다. 전날 밤은 너무나 피곤했기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곯아떨어지고 싶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이없이 이어진 고민들은 간밤의 시간 속에 온갖 잡념들을 우겨넣더니, 결국에는 나로 하여금 밤새 수면주기에 진입할 일말의 틈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간절함이 컸던 만큼 어깨에 이고 진 걱정의 무게도 더 크게 다가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 더미에 걸터앉아 노트북을 펼쳐든다. 공유기를 꺼내어 설치하고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들어간다. 열한시를 조금 넘은 시간, 앞으로 다가올 매일 매일이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긴 숨을 한번 내뱉어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한번도 해본 적 없던 1등이다.


펀딩을 시작하자마자 미친듯이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기쁨을 느꼈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축하가 겸연쩍었기에 조금의 민망함이 찾아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온갖 관심이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혹시나 꿈처럼 사라지면 어떡하나, 기쁨의 크기만큼 자라난 불안함이 불현듯 찾아오기도 했다.


벌써 한달이나 지났지만 어제의 일처럼 너무나 생생하다. 처음으로 오롯이 내가 번 돈이었다. 나의 지난 시간들이 결코 가치없게 보낸 무언가가 아니었다는 응답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수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응원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해도 될 것 같은 확신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밖을 나섰다. 그 어느때보다 긴 숨을 들이쉬어본다. 어느새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공기의 질감이 약간은 축축하지만,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상투적일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평생 그날을 잊지 못할 것 같다. 2016년 7월 6일. 남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어느 평범한 수요일의 아침이었다.


가방을 만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