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만들다. 열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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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지시서


다행히 굳게 닫힌 줄 알았던 사무실 문은 나를 막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돌려본 문고리는 철컥 소리와 함께 열렸고,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업무에 정신이 없으신 듯한 두 직원분들과 눈이 마주쳤다.

'백팩을 만들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조금은 밑도 끝도 없었던 양천가방협동조합과의 첫 만남이었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자주 보고, 같이 술도 마시는 조합 사무실의 실무 담당자 '영일이형'. 그 형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는지 초점을 잃은채 흔들리는 동공이 느껴졌지만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조합 이사장님이랑 이사님 오실테니깐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가방 만드는 이야기만 잠시 하려고 왔는데 본의 아니게 점심 식사를 하러 가시던 이사장님과 이사님의 발걸음까지 돌려세우게 되었다. 가방을 여기서 만들지 않으면 무슨 사단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지나친 환대에 조금은 부담스러움까지 느꼈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방이 여기서 만들어진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S 브랜드, B 브랜드, 요즘 잘나가는 가방 브랜드 중 하나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방인 R 브랜드까지. 만들고 계신 혹은 그간 만들어 오신 가방의 면면을 오래 살펴보지 않아도 그분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조합에서 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대표님은 이 가방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어요'

정확한 질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수많은 공장을 거쳐오면서, 나의 꿈과 이야기가 관심을 받고 공감을 얻은 유일한 순간이었다는 것 만은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한순간의 감상만으로 생산을 결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시해주신 조건 역시 지금까지의 공장들 중 가장 합리적이었는데, 이쯤 되면 양천가방협동조합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생산을 위한 협의와 준비는 일산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홀가분한 마음에 제동을 거는 마지막 관문이 하나 더 남아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걸 내가 직접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디자인 작업지시서'

가방의 기본적인 정보와 필요한 자재의 소요, 작업 시 주의 사항 등을 '지시'하기 위한 것으로 가방은 물론이고 의류, 신발 등 모든 디자인 제품의 생산 시 무조건 필요한 양식이다. 사실 이걸 내가 직접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가방의 디자인을 내가 직접 했기 때문에 이름부터 생소한 이 양식을 채워넣을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어떤 자재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파악하는 일은 지퍼의 갯수를 세고, 자로 벨크로의 길이를 재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원단과 보강재의 소요량을 산출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이걸 60개 정도만 하면 된다.


필요한 원단의 소요량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모든 패턴의 넓이를 일일이 측정해야 한다. 본체와 크로스백의 패턴 갯수를 합치면 약 60개. 결코 적은 갯수는 아니었지만 측정한 넓이를 더하기만 해서 구해지는 소요량이었다면 약간 귀찮은 일이었을 뿐 어렵지는 않았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덕분에 귀찮을 뿐더러 어렵기까지 했다. 우선 원단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는 과정이 고난의 연속이다. 원단의 폭은 90cm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패턴의 생김새에 따라서 손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 양을 최대한 줄이면서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는 원단 위에 패턴을 펼쳐놓고 퍼즐 맞추기를 해야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어릴적 대륙이동설을 배우며 6개 대륙 조각을 이리저리 껴맞추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에 더해 '철형'이라고 불리는 원단 재단 틀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분까지 계산을 하다 보면, 차라리 학교 다니면서 부지런히 풀어댄 미분방정식이 조금 더 간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고는 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원단과 안감, 보강재의 소요량을 모두 측정하는데 까지는 아마 하루 반나절이 조금 더 걸리지 않았나 싶다.

드디어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