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만들다. 열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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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난


사진 찍어줄 분을 찾았다, 동영상도 친구가 찍어주기로 하였다. 카메라는 참 고맙게도 고등학교 동기가 DSLR을 빌려주어 해결되었다. 소개 페이지는 내가 꾸역꾸역 완성만 하면 친구가 다듬어주기로 하였다. 가장 중요한 가방도 하나밖에 없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있다.

그런데 모델이 없다. 내가 길쭉하게 뻗은 사람이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나의 키는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치보다 약간 더 크다. 요즈음 중학생 여자 아이들 무리에 어울리면 크게 이질감 없는 수준이다. 여러모로 작가님의 피사체가 되기에는 결격 사유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모델을 매우 찾고 싶지만 나의 다급한 마음은 선뜻 이곳 저곳을 찾아 나설 여유를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작가님의 뷰파인더 안에는 내가 들어가기로 하였다. 여자친구를 포함한 아주 많은 지인들이 기껏 가방 잘 만들어놓고 그게 뭐하는 짓이냐며 경악스런 마음을 숨기지 않았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었던 나에게 작가님의 실력을 믿는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사진을 먼저 찍기로 하였다. 6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로 예정된 동영상 촬영 전까지는 10일 남짓이 남아있었다. 평일에는 작가님께서 틈틈이 제품 촬영을 해주시고, 주말을 이용해서 가방을 메고 야외 촬영까지 진행하여 동영상을 찍기 전까지 모든 사진 촬영을 완료할 심산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사진은 펀딩을 시작하기 3일 전에야 촬영을 완료할 수 있었고, 동영상은 펀딩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까지 찍어야 했다.

사진을 찍는 일은 나의 생각보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신상' 시즌이 겹쳐 회사의 신제품 촬영만으로도 밤낮이 없으셨던 사진 작가님께 일정을 재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일주일 내내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리허설을 하기로 한 주말에는 왜 그렇게 미친듯이 비를 퍼부어대는지,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릴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동영상 촬영을 이틀 남겨둔 주말의 하늘은 다행히 비를 뿌리지 않았기에 고대하던 리허설을 할 수 있었지만, 제품과 본 야외 촬영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대로 동영상부터 찍게 되었다.


리허설에서 찍은 것이지만 사진이 너무 예뻐서 그냥 쓸까 생각도 했다.


동영상을 찍는 것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얀색 배경에 제품의 기능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크로마키'라고 불리는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해야한다. 초록색이나 파란색 배경에서 연기를 하고, 배경을 모두 날리고 나면 영상이 완성되는데 크로마키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고, 영상 편집까지 경험해본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촬영에 참여한 세 명 중에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 당연히 영상에서 배경의 색을 제거하는 작업은 나의 몫이 되었다.


영상 편집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베가스, 프리미어, 애프터이펙트까지. 이름만 들어보았고, 포토샵과 마찬가지로 내가 다룰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프로그램들을 처음으로 만져보게 되었다. 어영부영 체험판을 설치하고는 온갖 블로그와 유투브 동영상들을 뒤져본다. 필요한 기능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만 해도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지만 혼잣말을 궁시렁거리며 따라하다보니 글자도 넣고, 필요한 만큼 영상을 오려서 붙이기도 하면서,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꼬박 하루 밤을 새고 나서야 첫번째 영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가방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절망적이다.


절망적인 결과물이었다. 사진 작업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급한데, 영상은 도저히 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가방이 '잘 안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크로마키 스튜디오의 배경 색을 제거하는 것인데, 요령 없이 촬영을 하다보니 완전하게 색을 제거할 수 있도록 원본 영상을 찍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몇번의 랜더링을 거치면서 마구 떨어지는 해상도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하루동안, 이런 기능들이 있구나. 살펴본 것이 전부였던 나의 비루한 실력으로는 도저히 깔끔한 영상을 만들어낼 재간이 없었다. 이 영상을 대문에 내걸었다가는 오는 손님마저 다 내쫓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그 수준이 조잡하고,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적어도 가방이 한개라도 팔리는 것을 보고 싶다면, 영상은 무조건 다시 찍어야 했다.

사진도, 동영상도 갈길이 요원하기만 한, 그야말로 진퇴양난과 같은 상황. 펀딩의 시작을 일주일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