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만들다.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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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유


모든것이 문제없을 것이라 장담한 공장 사장님을 지나치게 신뢰했던 나에게는 아무런 걱정 없이 창업 교육과 크라우드 펀딩 교육을 받으며 소일하는 한가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너무 빨리 성공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지금 생각하면 밤마다 이불을 걷어차다 못해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탈탈 털어넣어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은 심해에 갖다 버리고 싶을만큼 어처구니 없는 상상도 가끔씩 하면서.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망상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의 말초신경들도 깨닫게 되었다.


샘플을 의뢰한지 일주일 즈음 지난 후부터, 공장 사장님으로부터 매일 전화가 걸려왔다. '아아...'하는, 한숨인지 고민인지 그 의도가 불분명한 짧은 탄식과 함께 시작되는 길지않은 통화의 요지는 언제나 같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인생의 좌우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런 저런 이유로 그건 할 수 없다.' 가 그 한결같은 결론이었다. 사실 사장님이 무어라 하는지 이해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기지수였다. 무조건 나의 의견을 관철시켜도 시원찮았을 그 상황에서, 대화의 시작조차 불가능할 만큼 나는 도대체가 아는것이 없었다. 문제가 무엇인지나 파악하면 다행이었던 나에게는 결국 전화가 올 때 마다 '아.. 그렇습니까.' 한마디만을 멍청하게 되풀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대체 되는건 뭐가 있는건지 물어보는게 빠를 정도로 쌓여만 가는 기능 구현 불가 통보에 내 가방은 처음의 의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사장님의 기술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국내 유명 핸드백 제조회사의 개발 실장으로 10년 넘게 근무하신 사장님은 나의 가방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어줄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고민하셨다. (사실 지금은 정말 그랬을까도 의문이다) 단지 내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해야하는지, 그 방법을 전혀 몰랐을 뿐이다.


그야말로 돈을 길바닥에 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던 것인지,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원래 그런것이려니 하며 가방을 찾으러 가는 날만 기다렸다.



사진만 보았을 때,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샘플을 받자마자 내가 직접 찍었던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나고 꼴보기가 싫었으면 핸드폰에서 모조리 지워버린 듯 하다. 계속 뒤져보던 중 공장 사장님이 문자로 보내준 사진이 몇 장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들을 보자마자 두가지 이유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아이고 호구 왔는가' 싶어서 어떻게든 등쳐먹으려고 한 썩어빠진 양심에 분통이 터지는 것과 별개로, 저 가방을 만들기 위해서 시세보다 20만원 넘게 덤터기를 쓴 50만원이라는 거금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덜컥 송금했던 지난날 나의 경솔함과 멍청함에 화가 났으며 사기를 당했나 싶을 정도로 건네준 도면과는 완전히 다른 가방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괜찮네' 하며 속없이 주변에 자랑을 했던 그 당시의 내가 떠올라 화가 났다. 그저 내가 디자인 한 가방이 세상에 빛을 보았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했던 것인지 저 가방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친구들에게 참으로 부지런히 '자랑'을 했다. 진지하게 저 정신나간 놈을 말려야하나 고민했다는 많은 친구들의 철 지난 고백의 배경이 된 시기도 아마 저 가방이 나온 즈음. 뭐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는 나의 명백한 멍청함과 경솔함에,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화가 난다. 거기에 더해서 아직 화가 치밀어오르는 사실이 더 남아있다는 것은 한심함을 떠나 서글프기까지 하다.


카톡과 육성으로 쏟아지는 당시의 나에 대한 친구들의 고백


수업료 지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끝을 모르는 멍청함으로 인해 나는 두번째 샘플마저 같은 공장에 의뢰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