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만들다. 일곱

조회수 4258

회색 원단


비장한 각오로 닻을 올린 구성원 1명의 가방원정대는 축구계의 명장면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는 '후지산 대폭발 슛' 혹은 '신칸센 대탈선 슛'을 연상케 하는 완벽한 헛발질과 함께 화려하게 시작됐다. 하지만 괜찮다. 남아도는건 시간이고 다행히 아직 밥은 잘 먹고 다녔기에 하루 허탕쳤구나. 하고 훌훌 털면 될 일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발걸음을 옮긴 곳은 신설동에 위치한 원단 시장. 정형돈과 데프콘이 사랑한 동묘가 사이좋게 붙어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가방 자재 전문 시장이다.



마치 70년대로 돌아온 듯 간판조차 이채롭다.


최신식의 주상복합 아파트와 지어진 지 40년이 넘어, 들어서는 입구의 울퉁불퉁한 바닥 조차 불안하기만 한 낡은 상가 건물이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조금은 낯선 동네. 상인 분들의 부지런한 오토바이 소리와 미싱이 드르륵대는 소리가 낡은 건물의 작은 창문 너머로 아련히 들려오는 그곳은 내 꿈이 조심스레 싹 트고 자라날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원단 구경은 언제해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시장을 한바퀴 돌아본다. 이곳에는 내가 찾던 '폴리 600D' 원단도 있고 가방 안감으로 쓴다는 '나일론 210D' 원단도 있다. 가죽을 파는 매장 안은 각지에서 온 가죽 공방 주인들로 북적거린다. 지퍼만 파는 곳도 있고 보강재로 쓰이는 각종 스펀지를, 가방에 들어가는 여러가지 장식을 취급하는 매장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원단을 파는 곳부터 한 군데씩 들어가본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이다. 남성 서류가방에 많이 쓰이는 약간의 파란 빛이 감도는 진한 회색. 도대체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저 색깔을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설동의 원단 매장은 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매장을 두 번씩 돌아봐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없던 색깔의 원단이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역시 나는 불꽃과는 거리가 먼 포기가 빠른 남자. 그냥 다른 색의 가방을 만들기로 했다. 아무리 판매를 위한 가방이라지만 적어도 내가 쓰고 싶어서 만드는거니깐 원단 색 정도는 나의 취향대로 골라도 되겠지. 그때부터 온갖 원단 샘플들을 닥치는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아마도 신설동에서 판매되는 원단 중 '회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폴리 600D 원단은 전부 수집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신설동에서 흘러갔다. 온갖 종류의 보강재부터 시작하여 지퍼, 슬라이더, 크로스백의 가방끈을 거는데 쓰이는 각종 부자재까지 가방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의 정보가 다이어리에 차곡차곡 옮겨졌다.


그저 동대문에서 마주친 의상 디자이너분들의 다이어리를 따라하고 싶었는데, 유용하다.


얼추 준비는 끝난 듯 하였다. 드디어 샘플을 만들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