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여행기 #.12 세렝게티 이틀째, 오늘은 나무 타는 사자를 만났다.

2023-09-05
조회수 742

이 사자는 무료로 올라줍니다



기분 좋게 시작된 이튿날 아침. 열기구에 올라 세렝게티의 일출과 함께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 아래에는 근사한 만찬이 이들을 기다린다. 지나치게 탁 트인 것 같은데. 사자라도 오면 어떡하지. 내 일도 아닌데 오만 가지 걱정이 머릿속을 스친다. 하지만 그런 건 나만 하는 생각인지 사람들은 싱글벙글하기만 하다.



아침을 여는 코끼리 친구들. 충분히 반갑고 기쁘지만 간단하게 인사만 건네고 걸음을 재촉한다. 당장 어제 우리가 만난 코끼리가 500마리 가까이 된다. 코끼리는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다. 평생 볼 코끼리는 어제 다 봤다.



이 녀석들은 대머리 황새다. '건강 아저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다. 아마도 탄자니아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새 중 하나다. 우리네 비둘기만큼이나 흔해서, 그야말로 널린 게 건강 아저씨다.



부지런히 달리던 차가 어느 바위산 앞에서 멈춰 섰다. 이미 차량들로 빼곡한 틈바구니를 뚫고 큰형의 캠코더를 통해 만난 것은 정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마리의 표범이다.



어제 표범을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다. 가이드 형님의 추측에 따르면 어제 만난 녀석과 같은 표범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말이 되나 싶은데 말이 된다. 생각보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 표범이란다. 경력 20년의 가이드 형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닐 테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대초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먹으려는 자와 먹히지 않으려는 자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잘 보이진 않을 테지만 기린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가 서로를 노려보며 긴박하게 대치 중이다.


이 긴장이 얼마나 유지되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 가까웠다. 그 말인즉슨, 사자가 먹잇감을 덮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성과 없이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면 오늘 사자는 그저 굶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꼬냐기 섞은 칵테일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 기세를 이어 다시금 술판을 벌인다. 새벽에서 벌인 술판은 아침을 지나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그야말로 하루 종일 이어졌다. 안 그래도 즐거운 세렝게티 여행에 온갖 종류의 알콜이 함께하니 웃음이 끊길 새가 없다.


물론 떠나간 과거일 뿐이다. 나는 술을 끊은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시방 이게 뭐여. 내가 뭘 보고 있는겨.


대체 왜 거기 계신 거죠..?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나는 사자가 나무를 탄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두 마리나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 심지어 한 마리는 꽤나 여유로워 보인다. 한두 번 올라간 솜씨가 아닌 듯하다.


전날의 코끼리 500마리도 엄청났지만 아마도 그보다 귀한 구경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코끼리 500마리는 귀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했던 드라이버 형님마저도 감탄을 연발하며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당황스럽네. 여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자 선생님. 세렝게티에서는 처음 만나 뵙는데 이렇게 귀한 구경을 시켜 주시네요.



온갖 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나무에서 내려오는 묘기까지 풀코스로 선사하는 우리의 사자 형님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잔뜩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생각을 않는다.



나무에서 내려온 친구는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던 녀석을 만나 어디론가 모험을 떠나기 시작했다. 잘 가 친구들. 다음에 또 만나자꾸나.



만수무강하십시오.



마지막까지 화려했던 세렝게티는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우리는 한동안 달리기만 할 것이다. 응고롱고로를 향한 무한한 남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전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탄자니아에서 코이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여행 호스트조차 존재를 알지 못했던 건물이다. 코이카에서 지어준 것으로 보이는 세렝게티 미디어 센터의 화장실은 시설도 훌륭하고 아주 깔끔했다. 기분 좋게 사진 한 방 남기고 다시 차에 오른다.




진격 또 진격, 계속 진격이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대동맥과도 같은 B144도로를 끝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한 시간 남짓을 달려 세렝게티를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발상지라고 알려진 올두바이 협곡을 지나 마침내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마치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벗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가끔은 이렇게 길을 건너는 얼룩말도 만나고 누떼도 만난다. 이 녀석들은 인간의 기계 문명과 공존하는 법을 잘 알고 있기에 적당히 신호를 지킬 줄도 알고 나름의 질서도 잘 잡혀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과 함께 달리고 또 달린다. 직접 마주한 것의 총체가 한 권의 책이라면, 지금 내가 말로 늘어놓는 것은 책의 표지 한 장만큼도 되지 못할 만큼 비루하고 무미건조하다. 이 순간의 서정과 감상은 직접 겪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재현할 수 없다. 일단 나의 글솜씨로는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지나온 세렝게티의 광활한 평원이 발 아래에 놓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렝게티와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여기는 Naabi hill gate다. 올두바이 협곡으로 이어지는 세렝게티의 남쪽 경계다. 우리는 이곳에서 퇴장 수속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오늘 점심도 어제처럼 도시락이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 샌드위치 종류만 달라졌을 뿐 구운 닭과 계란, 비스킷과 음료의 브랜드 역시 완벽하게 동일하다.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아쉽지만 세렝게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다. 이 길은 곧장 응고롱고로 분화구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여행하는 입장에서는 이별하는 아쉬움 같은 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관리사무소는 입장 수입을 나누기 위한 행정적인 조치일 뿐, 여행자 입장에서는 여기도 세렝게티 같고 응고롱고로 분화구도 세렝게티처럼 느껴진다.



빠르게 스치는 얼룩말과 짧은 눈인사를 나누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까지 세렝게티 국립공원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뭔가 싱겁지만 세렝게티는 여기까지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올두바이 협곡을 지나 응고롱고로 분화구로 향하는 것뿐이다. 과연 어떤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부푼 기대를 안고, 살짝 밀려드는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금 길 위를 유랑한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