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전거 여행기 #.8 교토에서 고베까지 80km, 오늘도 달린다.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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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교토에서 고베까지 자전거로 달린 80km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뜨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린다.


비가 내리는 중이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비가 온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마주하는 난관이다.


오늘은 전체 자전거 일주를 통틀어서 가장 먼 거리를 가야 하는 날이다. 대체로 평지를 달릴 예정이긴 하지만 교토에서 고베까지는 80km나 떨어져 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하필 날씨까지 내 편이 아니라니.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나는 무사히 고베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챙겨왔을 리 만무하기에 우비를 사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또 난관에 봉착했다.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난관이 계속 등장한다. 내가 바란 건 단추로 여닫는 허름한 우비가 전부다. 하지만 여기 있는 우비들은 하나같이 너무 본격적이다. 아무리 봐도 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복장을 하고는 절대로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없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허름한 우비를 찾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누볐지만 모조리 실패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세 군데나 돌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허접한 우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본에서는 그런 우비를 만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바로 그 결과다. 불편할 거라 생각은 했고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몸뚱아리보다는 가방에 든 것들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방을 우비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길을 나서는 여행객들에게 소소한 웃음거리 하나를 선물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이 영상을 우울증 해소용으로 잘 활용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윈윈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겨우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섰다. 비가 그쳤다.


10분이나 걸려서 우비를 입었지만 비가 그쳤다. 머리가 뜨끈해진다. 당장이라도 몸에 밀착한 우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참는다. 내가 원하는 우비를 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다음 안장에 올랐다. 출발합시다.



썩 달갑지 않았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다. 몸에 쫙 붙는 느낌 때문인지 묘하게 안정감이 있다. 압박 붕대를 몸에 잔뜩 두른 것 같은, 마치 누에고치가 된 것 같은 안정감이다.


이대로라면 단숨에 주파할 수 있다. 이대로 전속전진이다. 가와라마치에서 출발한 자전거는 고베가 있는 남서쪽으로 진로를 향했고, 교토 산토리 맥주 공장을 지나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전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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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에 주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끼니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간만에 스키야에 들렀다. 먼 길을 가야 하니깐 치즈까지 추가해서 푸짐하게 먹었다. 길가다가 무작위적으로 만나는 가성비 덮밥집들은 자전거 여행의 가장 알토란 같은 존재였다. 이 녀석들이 없었다면 나는 700km 넘는 여정을 무사히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난한 맛과 저렴한 가격, 무엇보다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투철한 영업정신까지. 정처없이 유람하는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다.



생각보다 기세가 좋다. 어느새 20km가 줄었다. 이 기세라면 나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일주를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그새 요령이 생겼다. 뇌를 비우고 페달을 밟는 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아주 능숙해졌다. 이제는 노래 같은 걸 듣지 않아도 무념무상으로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어디쯤이었을까. 아사히 맥주 공장을 발견했다.


여기도 맥주 공장 투어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당연히 투어가 있다. 당일에도 방문이 가능한 것 같았다. 미리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곳에서 이날의 여정을 조기마감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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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예쁘게 생긴 공장이다. 이렇게 예쁜 공장에서 갓 뽑아낸 생맥주 한 잔이면 그저 행복할 텐데 아쉽지만 나는 고베로 가야 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자전거 안장에 몸을 싣는다. 안녕히 계세요. 언젠가 또 인사 드릴 일이 생기겠죠. 그때까지 기체후 일향만강하십시오.



열심히 달리다 보니 배가 아프다. 급하게 화장실에 들러 모든 볼일을 끝내고 이온음료 한 병을 사서 주차장에 퍼질러 앉았다.


무념무상으로 아드레날린에 절여져 있던 몸뚱아리가 현실로 돌아오는 중이다. 갑자기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프기 시작했다. 특히 무릎의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됐다.


요령 없이 무리한 게 원인인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재정비를 끝내고 다시 안장에 올랐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페달을 밟던 중에 대전을 닮은 도시를 만났다. 대전은 내가 졸업한 대학이 있는 도시다. 일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도시의 한적함과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해 본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갑자기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이 등장했다.


구글 지도를 켜보니 고베의 초입에 진입했다. 고지가 멀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난관이 당황스럽다. 이미 체력이 바닥을 향하는 와중에 오르막이라니,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비를 벗어던진 건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 정도 비라면 그냥 맞고 갈 만한 것 같은데, 버텨 볼까.



어림없는 소리. 빗방울이 갈수록 굵어지고 빗줄기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도 거칠어진다. 도저히 맞고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처마 아래에 자전거를 멈추고는 아침에 했던 짓거리를 또 한 번 반복했다.



광속으로 달리는 것 같지만 바로 옆을 스치는 트럭을 보면 가늠이 될 것이다.


조깅하는 사람보다도 느리게 페달을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골목길을 어떻게 지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자기방어기재가 작동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오늘의 숙소가 눈앞에 등장했다.



마지막까지 곱게 가는 법이 없다. 정말 아무런 힘이 남지 않은 상황에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오르려니 딛는 걸음마다 오금이 저리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나는 죽어가는데 자전거와 가방의 상태는 생각보다 멀쩡하다. 무탈하게 함께하는 이 녀석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가장 난관이라고 생각했던 80km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마침내 반환점을 돌기 직전인 것이다. 50km를 더 달려 히메지에 닿는 순간, 이 여정은 마침내 반환점을 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