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여행기 #.23 마침내 마주한 킬리만자로의 정상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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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주하기 힘들 일인가, 아! 킬리만자로



유니온 커피에서 마신 커피는 맛있었다.



미모사에서 받아든 고기로 가득한 한 상도 더할 나위 없었다. 술 한 잔이 더해지니 여기가 바로 현세에 강림한 주지육림이다. 매일이 오늘만 같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보다 본격적인 술판이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더니 어느새 술 병으로 산을 이룰 정도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나와 큰 형은 대낮부터 반쯤 맛이 가 버렸다.


'딱 좋다'를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이다. 우리는 파국의 문턱을 넘는 중이다. 그나마도 호스트 덕분이다. 그의 자제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후의 일정은 소멸했을 것이다. 백주대낮부터 탄자니아 모시의 땅바닥을 뒹굴었을 것이 분명하다.



제멋대로 흥청거리는 발걸음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봐도 희극이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바보들의 행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렴 좋다.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할 뿐이다.



킬리만자로를 본따서 만든 도시 초입의 로타리에서 걸음이 멎었다. 재미난 풍경을 앞에 두고 사진이 빠질 수 없다. 간만에 작가 정신을 발휘하여 형들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한다. 작품 활동의 시작이다.


물론 건진 것은 없다. 끊기기 직전의 정신줄을 처연하게 붙잡고 발휘한 작가 정신은 모자란 실력을 만나 시원찮은 사진으로 현현했다. 초점을 자동으로 돌려 놓는 것마저 깜빡했는데, 그걸 깨달을 정신조차 없어서 대부분 사진은 뿌연 눈을 하고서 세상을 본 것처럼 흐리멍텅했다. 단 한 장의 사진도 건지지 못했다.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찍히는 건 영 아니올시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다. 기분 좋게 뷰파인더 안의 피사체가 되어 본다. 제가 찍은 사진은 모조리 망했지만 형만이라도 그러지 마십셔. 잘 부탁드립니다.




이 카메라는 형이 쓰셔야겠는데요.



큼지막하게 솟은 하나의 봉우리만이 생각 나는 킬리만자로는 사실 두 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솟은 산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해발 고도 5,900m의 키보 봉이다. 아프리카의 지붕이며 킬리만자로의 상징이다. 정상의 만년설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리카의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다.


두 개 중 2등이라서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비운의 봉우리, 이 녀석에게도 이름이 있다. 이름하야 마웬지 봉. 키보 봉의 유명세가 워낙에 굉장해서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이 녀석도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어쨌든 해발 고도가 5,200m에 육박하니 말이다.



킬리만자로를 즐겼으니 다시금 걸음을 이어간다. 다음으로 향할 곳은 없다. 계획 없이 무심코 닿는 발걸음이 멎는 곳이 우리의 다음 목적지다. 디즈니 만화동산에서나 볼 법한, 그야말로 만화 같은 구름이 우리와 함께하는 중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벗하며 유람하는 시간, 그 자체로 쉼이고 여행이다.



거리 위로 아스라이 쏟아지는 오후의 볕은 꿈 속을 항해하는 한 척의 돛단배다. 보이지 않는 돛을 달고 살포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이리 흥청, 저리 망청거린다. 길섶을 뒹구는 따가운 겨울볕 아래의 잎사귀는 조용히 바스락거리며 어디론가 흩어진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따뜻하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중이다. 하지만 콧잔등을 스치는 공기에서는 은은한 꽃 냄새가 난다.


겨울이었다.



정신줄이 끊어지기 직전이지만 오히려 좋아.



그저 좋다.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30분 남짓을 부지런히 걸은 끝에 도착한 이곳은 모시에 하나밖에 없는 기차역이다. 아마도 모시 여행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녀석이다. 이곳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갑자기 기차역이라니 뜬금없는 감이 적잖이 있지만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아는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 호스트는 다 계획이 있다. 분명 큰 뜻이 있어서 걸음한 것일 테다.



하지만 궁금하다. 계속해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대답만을 반복할 뿐, 명확한 이유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고작 기차 한 대 떠나가는 현장인데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다. 모시 사람들은 흥이 많은가 보다.



호스트가 기찻길 위의 꼬맹이를 붙잡고 무언가를 묻는다. 그랬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모시역의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오는 광경은 호스트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역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차역이 다시 문을 열었다. 오늘이 이틀째란다. 선로 공사 때문에 오랜 시간 개점 휴업 중이었지만 다시금 문을 열었단다.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려 5년 만에 돌아온 기차를 반기기 위해서 모두들 모여든 것이다.


이토록 귀한 순간을 마주하게 되다니. 과연 형은 다 계획이 있구나.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토록 함구하던 '그럴 만한 이유'를 마주한다.


여기는 모시 전역을 통틀어서 킬리만자로의 풍광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지면부터 정상으로 향하는 킬리만자로의 완만하고도 웅장한 산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라고 한다.


근데 오늘은 아니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짤 없다. 호스트는 다 계획이 있었지만 날씨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기다려도 걷힐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30분의 기다림 끝에 입 모아 나가리를 외친다.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킬리만자로 안녕.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요.



오늘은 귀한 구경을 했으니깐 봐드립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러지 마십쇼.



마음이 급하다.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 밤에는 잔지바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야 한다. 미처 만나지 못한 킬리만자로의 그림자가 우리의 발걸음을 슬그머니 붙잡지만, 애써 떨쳐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바쁘다 바빠. 퍼뜩 짐 챙기쇼.



준비 완료. 이 택시는 킬리만자로 공항으로 향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택시 안이다.



갑자기 택시가 길가에 섰다. 그러더니 호스트의 상기된 목소리가 허공을 찢는다. 지금 당장 택시에서 내리란다. 지금 아니면 없단다.


맞는 말이다. 내가 봐도 지금 아니면 없다. 정신없이 트렁크를 열어서 삼각대를 꺼낸다. 카메라를 찾는 손이 벌벌 떨린다.



그렇게 우리는 킬리만자로 정상의, 그토록 고대하던 만년설과 조우했다. 불과 1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와 같았던 시간이지만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선연하다. 나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이지 눈물 나게 반갑습니다 킬리만자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발자국을 찍을 게 아니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비로소 여행의 반환점을 돌아나가는 기분이다. 이 비행기는 우리를 잔지바르로 실어나를 것이다. 호스트의 말에 따르면 이제부터는 천국 같은 시간만 기다린다.


과연 어떤 풍경과 이야기가 우리 앞에 펼쳐질까. 부푼 가슴을 안고 조그마한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즐거웠어요. 안녕 모시, 안녕 킬리만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