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여행기 #.24 이 비행기는 잔지바르로 떠납니다.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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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탄자니아의 주지육림, 잔지바르로 갑니다.



빅토리아 호수를 벗하며 사는 므완자 사람들에게는 호수의 넉넉한 품만큼이나 여유로운 일상이 있었다. 생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세렝게티의 야생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게 아름다운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킬리만자로의 눈 쌓인 정상을 망연하며 섰다.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 이룰 것은 다 이뤘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지금부터 남은 일정은 모조리 덤이라고 생각하련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택시에 오른다.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다섯 번쯤 반복했다. 30분 남짓을 달려 도착했다. 여기는 그 이름도 웅장한 킬리만자로 국제공항이다. 우리를 잔지바르로 실어다 줄 비행기가 기다리는 곳이다.



킬리만자로와 세렝게티를 좇아 발걸음한 사람들로 부산함이 끊이지 않는 공항이다. 탄자니아 최대의 도시는 다르에스살람이고, 관문 공항 역시 다르에스살람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공항이지만 여기가 더 번듯해 보이는 건 비단 기분 탓일까.


우리나라의 웬만한 지방 공항, 조금 구체적으로는 대구 국제공항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헛간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 아닌지, 마지막까지도 의심을 거둘 수 없었던 므완자 공항에 비하면 그야말로 선녀가 따로 없다.



예정보다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덕분에 느긋한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취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맥주 한 병을 집어 든다. 맛있는 술 한 모금이 함께하는 형들과의 수다는 언제나 즐겁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부지런히 마시고 즐기다 보니 잔지바르로 향하는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장내에 울려퍼진다. 때가 되었다.



유럽에서 B777급의 대형 항공기가 드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킬리만자로 공항이다. 하지만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오늘 우리를 잔지바르로 데려다 줄 녀석은 에어 탄자니아의 작고 귀여운 프로펠러기다.



얼마나 앙증맞은지 2층 버스 두 대를 줄지어 세우니 얼추 비슷해 보인다. 보딩 브릿지가 없어서 실망했지만 비행기의 크기를 보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너무나 지면과 가까워서 보딩 브릿지가 들어갈 공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옆나라 일본에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프로펠러기다. 크기도 작고 속도도 느리고 탑승 인원도 많지 않지만 압도적인 연비가 모든 것을 상쇄한다. 그렇다고 한다.



바로 앞에서 마주하니 앙증맞음은 배가 된다. 제아무리 쪼꼬미 비행기라고 해도 가까이에서는 웅장한 맛이 있는데 이 녀석은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것 따위 없다.


살짝 불안한 마음마저 생긴다. 이 녀석 과연 제대로 날 수는 있을까. 공대 졸업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자꾸만 불안함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프로펠러기가 안착하지 못한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건 우리의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탑승의 시간. 너덧 개의 계단을 올라 기내로 향한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드가자.



불과 10일 전에 A220을 경험했다. 그런 덕분에 쪼꼬미 비행기의 앙증맞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나의 모든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말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쪼꼬미다. 통로는 웬만한 버스보다도 좁고, 좌석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다. 비행기만큼이나 쪼꼬만한 몸뚱아리를 가진 나는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고통일 것 같다.



착석..을 하려고 하는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보관함이 너무 작다. 가방이 안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사람들의 짐이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집어 넣을 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꽉 들어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나와 형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다.



의자 아래에 욱여 넣을 만한 자리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나마도 없었으면 비행 내내 품에 안고 있을 뻔했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거슬리는 건 다리를 뻗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려니 한다. 가방이 없어도 똑같이 불편할 테다. 그러니깐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로 한다. 버텨라 핫산.



승객들의 수다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기내가 갑자기 거세게 요동친다. 그러더니 바로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굉음이 실내를 단박에 잠식한다.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당황스럽다. 소리가 크다고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체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비행기가 뜨기도 전이지만 한국에 안착하지 못한 이유를 모조리 깨달았다. 극악의 승차감을 경험한 이상, 반값에 표가 풀려도 나는 두어 번쯤 고민할 것이다.



기내가 어둠에 잠겼다. 우리 비행기는 하늘로 박차 오르기 위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가볍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말이 없다. 이륙하기까지의 모든 순간이 엄청나게 가볍다. 엔진 출력을 올리는 순간의 묵직함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기수가 하늘로 향하는 순간의 느낌 역시 깃털처럼 가볍다.



비행 시간은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것보다 짧다. 하지만 음료를 즐길 수 있다. 물과 주스는 당연하고 간단하게 술도 구비되어 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장님 저희 와인 한 병씩 주십쇼.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아주 앙증맞은 와인이다. 기린이 그려져 있는 예쁜 병을 지닌. 딱히 기대하지 않았지만 맛은 기대 이상이다. 적당한 단맛을 시작으로 여러가지 과일 향의 조화가 슬그머니 감탄을 부른다. 땅콩도 한 봉다리 나눠주는데 그 녀석과의 조합도 아주 좋다.




비행 시간이 워낙에 짧은 탓이다. 승무원들은 한시도 쉴 틈이 없다. 서빙을 끝내기가 무섭게 쓰레기를 걷어가고 착륙 준비를 하기 바쁘다.


나는 와인이 상 위에 올라온 순간부터 모든 것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승무원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아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정확히 5분 30초가 걸렸다. 그나마도 가운데 자리에 앉은 덕분이다. 맨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노래 한 곡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상을 접으라는 승무원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별빛이 박힌 것처럼 소복하게 빛나는 잔지바르의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이 활주한다. 우리 비행기, 곧 잔지바르 국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일단 입국 수속부터 하시죠.


같은 나라 안에서 무슨 입국 수속이냐 싶겠지만 사연이 있다. 탄자니아는 내륙의 탕가니카 공화국과 바로 이곳 잔지바르 공화국의 병합으로 탄생했다. 합쳐진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행정 체계가 완벽하게 통합된 것은 아니라서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공항에서의 입국 수속 역시 그중 하나다.



서류 작성을 마치고 입국 수속도 무사히 마쳤다. 우산 하나가 외롭게 돌고 있는 벨트 앞에서 망연한 채 수하물을 기다린다.


쪼꼬미 비행기의 장점을 발견한 뜻밖의 순간이었다. 탑승 인원이 많지 않아서 수하물을 찾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마침내 마지막 관문, 엑스레이 검사만 마치고 나면 마침내 꿈에 그리던 잔지바르다.



바로 지금, 여기. 마침내 잔지바르.


반갑습니다. 눈물 나게 반갑습니다.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숙소에서 마중을 나오셨다. 덕분에 편하게 목적지까지 닿을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얼른 짐을 풀고 늘어지게 자야겠다. 내일부터는 계획 없이 즐기는 휴양이 우리를 기다린다.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행복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낡은 봉고에 몸을 싣는다.


잔지바르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내일 다시 만납시다.